[칼럼] 교사 정재훈의 “꼰대가 바라보는 세상이야기” EP 15. 제2의 병자호란 #1
고고도미사일 방어체계(THAAD, Terminal High Altitude Area Defense)와 관련해서 지금 한국은 위기에 빠져있다. 제2의 병자호란이 펼쳐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한국은 강대국의 틈바구니 사이에서 곤란을 겪고 있다. 동아시아 정세는 지금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도성장을 달성한 중국이 동아시아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도전을 하고 있고, 이를 막기 위한 기존의 챔피언 미국과 일본 동맹이 군비를 확대하고 있다. 두 세력은 남한과 북한의 정세를 이용하여 힘겨루기를 하고 있다. 우리는 그 소용돌이 속에서 국론 분열이라는 또 다른 문제에 봉착하고 있다. 이번 칼럼에서는 오늘의 이런 문제에 대해 자세하게 살펴보려고 한다.
병자호란
임진왜란이 마무리되고 30년이 채 안된 1627년, 만주를 차지하고 있던 여진족을 통일한 누르하치가 후금(後金)을 건국하여 조선을 침공한다. 전란 후 쇠약해진 국력에다 대규모 부대의 급습으로 조선군은 맥없이 무너진다. 후금은 조선과 형제의 관계를 약속받고 군사를 물렸는데 이후 압록강을 넘어와 약탈을 하는 여진족들로 인해 조선은 곤경에 빠진다. 형제의 맹약을 맺었기 때문에 조선은 반격을 할 수 없었고, 이로 인해 조선 내에는 척화배금(斥和排金, 금을 배척하고 화의를 반대한다.)이 강하게 대두되었다. 그러던 중 후금의 사신이 조선에 붙잡히는 일이 발생하는데, 이에 대해 후금은 왕자를 볼모로 요구를 했고 조선은 거부하였다. 이듬해에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바꾸었는데, 태조 누르하치의 뒤를 이은 태종은 조선의 침략을 결심한다. 당시 중국은 강자로 떠오른 청(靑)과 쇠약해지고 있는 명(明)이 각축을 벌이고 있었다. 청군은 이미 만리장성을 넘어와서 명을 위협하는 수준이었다. 청의 선전포고에 조선은 청과의 일전을 준비하였지만 청의 전략과 기습으로 인해 단번에 한양이 위협을 받게 되었다.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을 가려고 했으나 도주로가 막혀 어쩔 수 없이 남한산성으로 옹진을 가게 된다. 20만 명의 청군은 인조가 있는 남한산성을 포위하고 백성들을 도륙했으며, 지원군 및 의병을 제압하였다. 강화도까지 함락되면서 인조는 결국 항복을 하게 되고 삼전도(三田渡)에서 굴욕을 맞게 된다. 이때부터 조선은 명과의 관계를 끊고 청과 사대관계를 맺게 된다. 왕자를 볼모로 데리고 가는 등 청과의 관계는 명과의 관계보다 훨씬 혹독한 조건을 달고 있었지만 조선은 거부할 수 있는 힘이 없었다. 이후 250여 년 후에 일어난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물러날 때까지 이런 관계는 계속 되었다.